혹 트럼프 기소될까봐? 美 "벽돌 하나하나 떼어내듯 ICC 해체"

루비오 "국가 위 군림, 미국인 위협"
회원국들에게 탈퇴 촉구 등 검토

2020년에 미군 전범 수사 놓고 갈등
트럼프 1기, ICC 인사 입국금지 제재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모습./AP 연합뉴스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모습./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13일 반인도주의 범죄를 심판·단죄하는 유일한 국제 상설 형사 법정인 국제형사재판소(ICC)의 해체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2002년 설립된 ICC와 여러 차례 반목해 왔지만, 해체까지 공언한 것은 이례적이다. 이날 외교 사령탑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전면에 나서 포문을 열었다. 루비오는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문에서 “우리는 정부의 모든 가용 수단을 동원함으로써 동맹국과 협력해 벽돌 하나하나 떼어 내듯 ICC를 해체할 것”이라고 했다.

루비오는 국무부를 통해 낸 입장문에서는 ICC를 “국가 위에 군림하는 초국가적 법 집행 기관”으로 규정하면서 “ICC가 미국인에게 가하는 위협을 해체하기 위한 과정에서 어떠한 외교적 수단도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국무부는 현재 검토 중인 ICC 겨냥 조치로 각국 정부에 대한 탈퇴 촉구, ICC 인사들에 대한 비자 취소와 입국 금지, ICC 관련 단체에 대한 경제 제재 등도 제시했다. 집단 학살·인권 침해 등을 심판해 온 ICC를 사실상 테러 단체와 비슷하게 다루겠다는 선언이다. 루비오는 별도로 올린 영상 메시지에서 “ICC와 그 동조자들이 법령, 협약, 국제법을 앞세워 미국에 대항해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도 말했다. 루비오의 공세에 ICC는 별도의 입장문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스테판 두자릭 유엔 대변인은 “ICC는 국제 사법 체계에서 매우 중요한 축이고, 매우 많은 회원국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중대 범죄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강력하게 옹호했다. ICC에 대한 입장을 두고 미국발(發) 외교 갈등이 불거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현재 ICC에는 125국이 가입해있는데 한국·일본·영국·캐나다·프랑스·독일 등 미국의 핵심 우방국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

13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도널드 J.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타주의 두 기념물을 수정하는 행정명령 서명식 도중 기자들에게 발언하고 있다./EPA 연합뉴스
13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도널드 J.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타주의 두 기념물을 수정하는 행정명령 서명식 도중 기자들에게 발언하고 있다./EPA 연합뉴스

지난해 1월 백악관 재입성 후 고립주의 대외 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펼치고 있는 트럼프가 ICC를 중대한 걸림돌로 보고 선제적인 무력화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이란을 상대로 함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2024년 11월 ICC에서 체포영장이 발부된 뒤 ICC에 대한 트럼프의 적대감이 커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ICC는 1990년대 르완다와 보스니아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대량 학살이 벌어진 뒤 반인도 범죄를 단죄할 상설 법정이 필요하다는 여론 확산에 따라 1998년 창설 근거가 된 로마규정을 통해 2002년 설립됐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인권의 본고장을 자임해온 미국과는 악연으로 얽혔다. 민주당 빌 클린턴 행정부가 2000년 로마규정에 가입했지만, 공화당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2년뒤 입장을 뒤집고 철회했다. 당시 9·11테러의 여파로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르고 있던 부시 행정부는 해외 파견 군인들이 ICC의 기소·수사 대상이 되는 것을 우려했다. 이에 외국에서 전쟁범죄로 고발된 미국인이 ICC에 회부되지 않도록 ‘미국 군인보호법(ASPA)’을 제정하며 ICC와 선을 그었다.

이 같은 대립구도는 트럼프 행정부 이후 더욱 악화됐다. ICC가 2020년 과거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미군의 전쟁범죄 의혹에 대한 정식 수사를 진행하려하자 트럼프 1기 행정부는 ICC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자산 동결, 비자 취소, 입국 금지 등의 제재를 내렸다. 트럼프와 반목했던 조 바이든 행정부도 2024년 ICC가 이스라엘의 하마스 격퇴전과 관련해 네타냐후에게 전쟁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하자 “터무니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2025년 네타냐후의 체포영장을 발부한 판사 2명 포함해 ICC 관계자 다수를 제재하며 보복 조치를 강화했다.

미국 정부와의 대립 구도가 선명해지면서 ICC의 구조적 한계도 부각됐다. ICC는 로마규정에 서명하고 비준까지 마친 125국에 대해서만 직접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 3국(미국·러시아·중국)과 이스라엘·인도 등 주요국은 비준하지 않았다. 그동안 ICC가 주도적으로 단죄한 지역은 우간다·콩고민주공화국·수단·케냐 등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이 크지 않은 나라들이라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돼왔다.

그럼에도 ICC가 거둔 성과도 상당하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2023년 3월 ICC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점령 지역 어린이들 납치에 대한 전쟁범죄 책임을 물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푸틴은 그해 8월 ICC 가입국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개최된 브릭스 정상회의 직접 참석을 포기하는 등 정상외교가 위축됐다. ICC는 이른바 ‘마약과의 전쟁’ 과정에서 무자비한 단속으로 인명을 살상했다는 비판을 받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을 작년 3월 체포·압송하면서 모처럼 존재감을 보였다는 평가도 받았다.

북한 정권의 인권 유린, 포로 미송환, 강제 노역 등 전쟁범죄의 책임을 묻기 위해 김정은을 ICC에 제소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받은 것도 북한 정권에 부담과 압박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유엔 총회는 연례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하면서 북한 인권상황을 ICC 에 회부하도록 안보리에 권고해왔다. 2010년에는 ICC 검찰부가 북한의 천안한 폭짐 및 연평도 포격도발 사건에 대한 예비조사를 진행했다. 트럼프가 ICC에 대한 압박 수위를 끌어올리는 배경에는 자신이 ICC의 수사 및 기소 대상이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로이터는 “향후 미군의 군사행동에 대해 ICC가 트럼프 행정부 관계자들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시도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가 일부 있다”고 분석했다./조선국제 

☞국제형사재판소(ICC)

집단 학살과 전쟁 범죄 등 반인도주의 범죄를 단죄하기 위해 2002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설립된 상설 국제 재판소. 재판부는 지역·성별·전문 분야 등을 고려해 비밀투표로 선출된 재판관 18명(임기 9년)으로 구성된다. 국가 간 분쟁을 다루는 국제사법재판소(ICJ)와 달리 개인이나 국가의 범죄 행위에 대해 광범위하게 심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