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정유 시설 200차례 핀셋 타격… 러 주유소 5㎞ 대기줄까지

전황 흔드는 '에너지 급소' 공습

지난달 29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한 주유소 앞에 급유를 기다리는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AP 연합뉴스
지난달 29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한 주유소 앞에 급유를 기다리는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AP 연합뉴스

4년 5개월째 러시아의 침공에 항전 중인 우크라이나가 최근 러시아의 정유 시설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정유 인프라 파괴에 따른 에너지 부족 상황을 시인할 정도로 우크라이나의 ‘주유소 습격’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지면서 교착 국면의 전황에 새로운 변수가 될지 주목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5일 폴란드의 안보 컨설팅 업체 ‘로찬 컨설팅’ 자료를 인용해 올해 들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정유 시설에 드론 공격을 최소 194회 가한 것으로 집계됐다고 보도했다. 이는 1년 전보다 11배 늘어난 수치다.

FT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가 지난 5월 러시아 정유 시설을 총 16번 공격했는데, 이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된 후 월간 최고 기록이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달엔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대형 정유 시설까지 여러 차례 공격했다. 특히 지난달 18일 공격 직후 러시아 국방부는 “총 555대의 우크라이나 드론을 격추했으며, 이 가운데 약 200대가 모스크바 지역에서 격추됐다”고 발표했다. 드론 요격 성과를 강조했지만, 우크라이나 드론이 크렘린궁(대통령실)이 있는 수도 모스크바까지 무더기로 도달했음을 시인한 것이다. 이날 공격으로 정유 시설 여러 곳이 드론 공격을 받고 화재가 발생해 진압까지 수 시간이 소요됐다고 모스크바 당국은 밝혔다. 특히 이 공격은 직전에 열린 프랑스 에비앙 7국(G7) 정상회의와 벨기에 브뤼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 일제히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방침이 발표된 뒤 단행됐다.

지난 6월 3일 크림 반도의 흑해 휴양 도시 예브파토리야에서 우크라이나가 물류 노선을 공격해 공급 부족 사태가 발생하자 당국이 연료 판매를 제한한 가운데, 주유소 앞 도로에 연료를 채우려는 차량들이 줄을 서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지난 6월 3일 크림 반도의 흑해 휴양 도시 예브파토리야에서 우크라이나가 물류 노선을 공격해 공급 부족 사태가 발생하자 당국이 연료 판매를 제한한 가운데, 주유소 앞 도로에 연료를 채우려는 차량들이 줄을 서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올 상반기 러시아가 요격한 우크라이나 드론은 최소 6만4000여 대다. 1월과 2월에는 요격 건수가 6000대를 넘기지 않았으나, 5·6월엔 각각 1만4000여 대, 1만7000여 대로 급증해 러시아 방공망에 큰 부담이 되는 상황이다.

우크라이나의 ‘표적 타격’은 러시아의 에너지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군 총참모부는 지난 4일 최근 공격으로 러시아 정유 시설의 42.7%가 무력화됐다고 발표했다. 로이터는 잇따른 드론 공격으로 지난달 러시아의 연료 생산량이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25%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는 작년 8월 이후 러시아 정유 업계의 손실이 총 135억달러(약 20조65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러시아엔 ‘에너지 공급 비상’이 걸렸다. 크렘린궁은 지난달 30일 “휘발유를 수입하겠다”고 밝혔다. 푸틴이 “연료가 부족해지고 있다. 정부가 이 상황을 해결하고 있다”고 말한 지 이틀 만에 해결책을 발표한 것이다. 이에 따라 휘발유 3만~4만t이 실린 유조선 두 척이 인도를 출발해 러시아로 향했고, 카자흐스탄도 8월까지 러시아에 휘발유 5만t을 공급하기로 했다. 러시아는 하루 석유 생산량이 미국·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3위에 이르는 대표적인 산유국이다.

지난 6월 20일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파괴된 흑해 연안 카프카즈 항구의 석유 저장소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크림 반도 당국은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 4명이 사망했으며 러시아가 점령 중인 크림 반도에서 연료 판매가 중단되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는 최근 몇 달간 크림 반도에 가해진 가장 큰 규모의 공격 중 하나로, 4년간 이어진 군사 공세의 핵심 물류 기지인 크림 반도의 군사 및 에너지 시설을 표적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Vantor/ AFP 연합뉴스
지난 6월 20일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파괴된 흑해 연안 카프카즈 항구의 석유 저장소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크림 반도 당국은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 4명이 사망했으며 러시아가 점령 중인 크림 반도에서 연료 판매가 중단되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는 최근 몇 달간 크림 반도에 가해진 가장 큰 규모의 공격 중 하나로, 4년간 이어진 군사 공세의 핵심 물류 기지인 크림 반도의 군사 및 에너지 시설을 표적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Vantor/ AFP 연합뉴스

원유와 석유 제품을 수출해 지난 4월에만 191억8000만달러(약 29조3300억원)를 벌어들였다. 그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주유소 습격’에 에너지 위기를 겪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푸틴이 재빨리 대체 휘발유 확보에 나선 것도 전쟁 피로감에 에너지난까지 떠안은 민심의 이반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에너지 공급난이 가중되자 모스크바를 비롯한 상당 지역에서 휘발유의 정상 판매가 중단됐고, 소련 시대를 연상케 하는 배급제까지 실시되고 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지난 3일 러시아 전역에서 연료 부족 현상이 심화해 주유소마다 휘발유를 구매하려는 줄이 5㎞까지 늘어섰다고 보도했다. 시베리아의 한 도로에선 900대가 넘는 차가 연료를 넣기 위해 36시간이나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포착됐다. 한 여성은 “2시간을 기다렸는데 기름을 넣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렸고, 한 남성은 “10L만 판다”는 주유소 직원의 말에 “그게 말이나 되느냐”고 고함을 쳤다.

모스크바타임스는 “사라토프·크라스노다르 등 일부 지역에서는 신분증을 제시한 공무원에게만 휘발유를 판매하고 있다”고 전했다. 2014년부터 러시아가 강제 점령 중인 크림반도에서는 최근 우크라이나 공격에 따른 정유 시설 파괴로 휘발유 가격이 정상가의 세 배까지 치솟았다고 미국의 소리(VOA)가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6월 30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주유소에 차량들이 연료를 채우기 위해 줄을 서 있다. 6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러시아 내 정유소들이 피해를 입으면서 사실상 모든 지역에서  연료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AFP 연합뉴스
6월 30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주유소에 차량들이 연료를 채우기 위해 줄을 서 있다. 6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러시아 내 정유소들이 피해를 입으면서 사실상 모든 지역에서 연료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에너지 시설을 ‘핀셋 타격’하는 이유에는 이 같은 ‘전쟁 피로감’을 고조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쟁의 장기 교착 국면 속에서 에너지 공급난으로 인한 물가 상승과 생활고로 나빠진 민심이 푸틴에게 종전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융단 폭격으로 대응하고 있다. 러시아는 튀르키예 앙카라 나토 정상회의 개막을 하루 앞둔 6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드론·미사일로 공격했고 최소 11명이 숨졌다. 지난 2일에도 미사일 74발과 드론 500여 대로 키이우를 맹폭해 최소 30명이 숨졌다. 하지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의 전쟁 자금을 만들어내는 기반인 에너지 시설을 계속 타격할 것”이라며 에너지 시설 표적 타격을 강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7월 6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아파트가 러시아의 미사일과 드론 공격으로 받아 부서져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7월 6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아파트가 러시아의 미사일과 드론 공격으로 받아 부서져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우크라이나의 표적 타격과 러시아의 십자 포화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막을 올리는 나토 정상회의에서 전쟁을 끝낼 돌파구가 마련될지도 주목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젤렌스키는 지난달 G7 정상회의에 이어 이번 나토 정상회의에서도 양자 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앞서 트럼프는 지난 4일 젤렌스키·푸틴과 연쇄 통화를 하며 중재 의사를 밝혔다./조선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