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어음만 받고 이란은 현찰 챙겼다

종전 MOU 공식 서명
이란 '핵포기' 구두로 약속하고
석유 수출과 자산 해제 얻어내
호르무즈는 60일만 무료 개방
"숙원 해소 종합세트 받은 셈"

17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 합의한 종전 양해각서(MOU)에 서명하고 있다(왼쪽 사진). 이튿날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도 MOU에 서명한 뒤 문서를 들어 보이는 모습을 국영방송을 통해 공개했다. /백악관 X·AFP 연합뉴스
17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 합의한 종전 양해각서(MOU)에 서명하고 있다(왼쪽 사진). 이튿날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도 MOU에 서명한 뒤 문서를 들어 보이는 모습을 국영방송을 통해 공개했다. /백악관 X·AFP 연합뉴스

“전쟁을 시작할 때 트럼프는 ‘이란의 무조건적 항복’ 외에 다른 거래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란은 축포를 터뜨리며 전쟁을 끝내게 됐다.”

뉴욕타임스(NYT)는 17일(현지시각) 미국과 이란이 체결한 종전 양해각서(MOU) 전문이 공개되자 이같이 평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번 합의를 통해 전쟁 107일 만에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과 이란 비핵화의 길을 열었다고 주장했지만, 워싱턴 정가에선 비판이 확산하고 있다. 미국이 제재 완화와 동결자산 해제, 원유 수출 허용 등 핵심 협상 카드를 먼저 내준 반면, 이란은 핵무기 개발 포기 선언을 구두로 약속하는 수준에 그쳤다는 것이다. “이란에 숙원해소 종합세트를 안긴 셈” “미국은 어음 한장에 현찰을 모조리 내줬다”는 말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G7(7국) 정상회의 참석차 방문 중인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이란 측과 MOU에 공식 서명했다고 백악관이 밝혔다. 이란 외교부도 “양국 대통령이 공식 서명했다”고 했다. 애초 MOU는 19일 대면 서명식 이후 공식 발효될 예정이었지만, 이날 양국 대통령 서명으로 발효가 앞당겨졌다.

이란이 핵을 포기하는 반대급부로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는 것을 골자로 한 이번 합의에 대해 트럼프는 “우리가 달성하고자 했던 모든 목표, 그리고 그 이상”이라고 자평했다. 트럼프는 오바마 행정부가 2015년 체결했던 이란 핵합의(JCPOA)를 “핵무기로 가는 길”이라고 비판한 뒤 이번 ‘트럼프 합의’는 “핵무기로 가는 길을 막는 벽”이라고 했다.

17일 프랑스 에비앙레뱅에서 열린 G7 정상회의 폐막 후 기자회견을 마치고 무대를 떠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 연합뉴스
17일 프랑스 에비앙레뱅에서 열린 G7 정상회의 폐막 후 기자회견을 마치고 무대를 떠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 연합뉴스

그러나 공개된 문안이 트럼프의 설명과 달리 이란에 훨씬 유리한 구조로 분석된다. 가장 큰 논란은 호르무즈 해협 조항이다. MOU 5조는 이란이 상선의 안전한 통항을 보장하되 “60일 동안만 아무런 비용 없이”라는 조건을 명시했다. 이는 그간 “호르무즈 해협이 완전히 개방되고 통행료도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 트럼프의 발언과 배치된다. 실제로 이란 협상단장인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의회 의장은 이날 국영TV 인터뷰에서 “호르무즈 해협은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요금을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상 60일 뒤 통행료 부과 의사를 공개 선언한 셈이다.

◇‘오바마 합의’보다 후퇴… 이란 “60일 뒤 호르무즈 수수료 부과”

에너지 부문 역시 미국이 대규모 선제 양보를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MOU 10조는 서명 즉시 이란산 원유와 석유화학 제품, 파생상품 수출에 대한 제재 면제를 규정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제재가 완화될 경우 이란의 연간 원유 판매 수입이 600억달러(약 91조원)를 넘어설 수 있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MOU 6조에는 최소 3000억달러(약 457조원) 규모의 이란 재건·경제개발 계획 수립 조항까지 포함되면서 트럼프가 과거 오바마 행정부의 17억달러(약 2조5000억원)의 이란 자산 반환을 “퍼주기”라고 비판했던 것과 비교해 훨씬 큰 경제적 혜택을 약속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핵 프로그램 관련 MOU 8조는 이란이 “핵무기를 획득하거나 개발하지 않는다”고 재확인했지만, 이는 2015년 오바마 행정부의 핵 합의에도 포함됐던 문구다. 오히려 당시에는 이란이 보유한 농축 우라늄의 97%를 러시아로 반출했지만, 이번 합의에서는 농축 물질을 이란 내에서 저농도로 희석하는 방안만 적시됐다. 트럼프는 이란의 농축우라늄을 ‘핵먼지’(Nuclear Dust)로 표현하면서 “미국으로 가져올 것”이라고 해왔다. 하지만 에스마일 바가이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이날 “이란의 핵물질은 국외로 반출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18일 프랑스 오를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에어포스 원에 탑승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8일 프랑스 오를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에어포스 원에 탑승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제재 해제 조항도 비판 대상이다. MOU 7조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와 국제원자력기구(IAEA) 결의, 미국의 1·2차 제재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제재” 종료를 목표로 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문안 어디에도 이란의 테러 지원, 탄도미사일 개발, 드론 프로그램, 미국인 암살 음모, 중동 내 대리 세력 지원 등 그간 미국이 제재와 군사 압박의 근거로 삼아온 사안들은 언급되지 않는다. 동결 자산 해제 조항 역시 자금이 “어떤 최종 수혜자”에게도 지급될 수 있도록 규정해 테러 단체나 제재 대상 기관, 이란혁명수비대(IRGC) 연계 단체 등으로 흘러들어갈 가능성을 차단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또 MOU 2조는 미국과 이란이 서로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워싱턴 일각에서는 이 조항이 향후 이란 내 인권 탄압, 반정부 시위 진압, 시위대 살해 문제 등과 관련해 미국이 추가 압박에 나설 여지를 스스로 좁힌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트럼프는 전쟁 초기 이란 국민들에게 정권에 맞서 일어설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했지만, 이번 합의문에는 사실상 그와 정반대 취지의 문구가 담긴 셈이다.

CNN은 트럼프가 자신의 저서 ‘거래의 기술’에서 “협상에서 가장 나쁜 것은 합의를 절실히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썼음에도 트럼프 스스로 이란과의 합의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하며 “이번 MOU의 본질은 이란이 당장 수백억 달러를 얻는 대신 호르무즈 해협에서 선박에 총을 쏘지 않는 것뿐”이라고 했다.

의회에서도 우려가 이어졌다. 민주당 팀 케인 상원의원은 “오바마 핵합의에서 우리가 얻었던 것보다 훨씬 더 이란에 많이 내주고 훨씬 더 적게 받는 합의”라고 했고, 공화당 빌 캐시디 상원의원은 “이란의 핵 야망은 억제되지 않았고, 호르무즈 해협을 위협하는 효과를 배웠으며 이번 합의 아래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프라를 건설하게 됐다”고 했다. 공화당 존 튠 상원 원내대표도 “의원들이 합의에 대해 질문할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논란을 의식한 듯 트럼프는 이날 취재진에게 “이란이 협정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이를 준수할 때까지 다시 폭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내 유가 급등과 경제 침체 우려 때문에 서둘러 MOU를 체결한 트럼프가 다시 이란과의 전면전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많다./조선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