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와 공조에도 끝모를 엔화 약세

日 감세 정책 등 재정확대 영향

3줄 요약
달러당 엔화 환율 장중 160엔 돌파
미 재무장관 스콧 베선트 금리 인상 압박
다카이치 정권 감세 정책에 재정 패전 경고
그래픽=양인성
그래픽=양인성

지난 7월 급격한 엔화 약세에 제동을 걸기 위해 미·일 정부가 이례적인 공동 개입에 나섰지만, 달러당 엔화 환율이 다시 160엔대에 육박하며 엔화 약세가 재현되고 있다. 거대한 엔저 흐름을 막지 못하는 배경에 일본 다카이치 사나에 정권의 ‘감세 포퓰리즘’을 비롯한 재정 확대 정책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31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엔화 환율은 장중 한때 160엔까지 돌파했다가 소폭 하락해 159.7엔으로 마감했다. 지난 7월 31일 미국과 일본 정부가 엔저에 대응하기 위해 15년 만에 공동 개입에 나서면서 156엔대까지 떨어졌던 달러당 엔화 환율이 뚜렷한 상승(엔화 가치 하락)세로 바뀐 것이다.

양국의 공조가 무위로 돌아가면서 미·일 관계에 이상 조짐도 감지된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권의 경제 사령탑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부 장관은 지난 30일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은행이 엔저 대책으로 연속적 금리 인상을 검토해야 하는지 묻자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다카이치 총리의 지지를 바탕으로 적절한 대응을 취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엔저 흐름에 노골적 불만을 표시하며 큰 폭의 신속한 금리 인상을 압박한 것이다.

◇엔저 부추긴 사나에노믹스… “2차대전 버금가는 재정 패전 위기”

베선트는 “(다카이치 정부는) 그냥 가만히 앉아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적극 재정 정책)의 성공을 누리고, 그것이 계속 작동하도록 두면 된다”고도 말했다. 최근 야심 찬 투자 계획과 감세 정책을 내놓은 다카이치 정권에 추가적 재정 확대는 굳이 필요 없다는 경고성 발언으로 해석된다.

실제 최근 채권 시장에선 일본의 금리 인상 전망에 더해 재정 악화 우려까지 겹쳐 일본 10년물 장기 국채 금리가 2.94%를 넘고, 30년 만에 3%를 넘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국채 금리가 올라가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이 200%에 달하는 일본 정부가 갚아야 할 이자 부담이 빠르게 늘고, 기업들의 자금 조달 환경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물가 상승과 재정 악화의 악순환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면서 일본 언론에선 “제2차 대전 패전에 버금가는 ‘재정 패전’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경고까지 나왔다.

다카이치는 취임 직후부터 휘발유세·소득세 인하, 가솔린 보조금 지급, 전기·가스 요금 지원 등 각종 감세 정책을 펴왔다. 최근엔 8%의 식품 소비세를 내년부터 1%로 줄여주겠다는 약속도 확정했다. 국민의 물가 상승 부담을 줄여주는 한편, 세수 부족은 경제 성장을 통한 과실로 메우겠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17개 산업 분야에 370조엔(약 3168조원)의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겠다고 했다. ‘책임 있는 적극 재정’으로 알려진 이 같은 ‘사나에노믹스’는, 하지만 시장에선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경제 성장의 과실은 불확실하고 먼 이야기인 반면, 일본 정부의 재정 악화는 당장 눈에 닥친 현실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금 엔화 약세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일본은 미국 국채의 최대 보유국으로, 엔화가 급락하면 일본 정부가 달러를 시장에 풀기 위해 미 국채를 팔 수 있다. 최근 AI 빅테크 기업들의 대규모 채권 발행과 미국 재정 악화 우려로 미 국채 금리가 17년 만의 최대(30년물 5.3%)를 기록한 상황에서, 일본의 국채 매도까지 더해지면 미국 채권 금리 상승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이 때문에 미국 경제 관료들은 다카이치 정권의 재정 확대 정책에 대한 우려와 정책 금리 인상 필요성을 물밑에서 제기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다카이치는 감세 정책을 멈추지 않고 있다. 최근 황실기본법 개정 등 민생과 관련 없는 사안에 집중하는 데 대한 비판 여론으로 지지율이 10%포인트가량 하락하자 돌파구가 필요했던 다카이치는 지난 7월 30일 “내년 4월부터 2년간 식품 소비세를 8%에서 1%로 인하하겠다. 2년 뒤엔 내 책임으로 원래대로 되돌리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소비세 감세에 필요한 10조엔의 재원은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다카이치는 “적자 국채로 재원을 조달하지 않고, 세외 수입·보조금·특별회계·조세 특례 등을 손봐서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소비세뿐 아니라, 고교 급식 무상화 등에 필요한 7000억엔, 역대 최대를 경신 중인 방위비, 1년 만에 3조6000억엔 늘어난 국채 이자 비용, 2040년까지 17개 분야 370조엔 투자 계획 등도 재원 조달이 마무리되지 않았다.

일본 내에서 다카이치의 공언대로 2029년 소비세율이 원상 복구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2028년 여름 참의원 선거, 2030년 2월 중의원 선거가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세율 인상의 고통을 국민에게 감수하라고 요구할 정치인은 없을 것이란 분석이다. 여야 정치인·관료들이 참여하는 회의체 사회보장국민회의 실무자회의 의사록에는 “엔저가 계속되면 수입 상품 가격이 높아져 소비세 감세를 통한 물가 하락 효과를 상쇄해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채권 시장 관계자들의 경고가 담겨 있다.

하지만 다카이치 정권이 정책 기조를 바꿀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특히 금융·투자 확대 등 ‘아베노믹스’를 펼쳤던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다카이치 총리는 재정 건전성을 중시하며 정부 투자 확대를 경계하는 재무성 관료들에 대한 불신이 깊다. 31일 일본 각 정부 부처는 재무성에 2027년도 예산을 대략 요구하는 ‘개산(概算) 요구’를 마쳤는데, 총 예산 요구액이 역대 최대인 143조엔에 달했다.

현 상황을 일본이 미국에 패배한 태평양전쟁 종전 상황에 빗대 엄중하게 보는 시각도 있다. 닛케이는 이날 재정 상황과 관련해 야당 인사의 개탄을 전했다. “1941년 총력전연구소(군국주의 시대 싱크탱크)가 전쟁의 지속 능력을 분석해 ‘미국과의 전쟁은 불가’라는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그해 12월 전쟁 발발을 막지 못한 것처럼 사회보장국민회의도 다카이치 총리를 막지 못했다. 일본 경제는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이 일본에 결정적 승기를 잡은) 미드웨이 해전과 같은 대패를 당할 수도 있다.”/조선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