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가 국민 기본권 박탈"... 분노한 2030, 잠실 개표소로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1만명 집결... 시위 사흘째 이어져
투표소 고립됐던 선관위 직원 수십명은 탈출한 듯
대학가서도 "선관위 규탄" 입장문 잇따라 발표
100m 옆에선 K팝 공연 열려 인파사고 우려도 나와

6일 오후 집회에 참석한 한 청년 남성이 '좌우 이념이 아닌 국민 권리'라는 문구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독자제공
6일 오후 집회에 참석한 한 청년 남성이 '좌우 이념이 아닌 국민 권리'라는 문구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독자제공

‘좌우 이념이 아닌 국민 권리.’

6일 오후 6시쯤 서울 송파구 잠실 개표소 앞에는 수많은 집회 참여자 사이로 이 같은 문구가 적힌 손팻말이 올라왔다.

이 손팻말을 들고 온 남성 A(26)씨는 “6·3 지방선거는 절차적 정당성을 잃었다”며 “내가 지지했던 후보가 재선거로 낙선하더라도 재선거는 불가피하다”고 했다. A씨는 처음으로 집회에 참석해 봤다고 한다. 홀로 집회를 찾은 A씨는 “친구들에게 함께 집회에 가자고 하면 부담이 될까 봐 혼자서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재선거는 불가능한 것 아니냐고 묻자 A씨는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발전한 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왔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잠실 개표소 앞, 분노한 20·30 청년들 몰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서울 송파구 잠실 개표소에서 재선거를 요구하는 시위가 50시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집회 참석자 대다수는 20·30 청년층이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항의하며 개표소 봉쇄 시위를 이어가는 시민들이 6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 설치된 개표소 앞에서 재선거를 요구하고 있다. /뉴시스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항의하며 개표소 봉쇄 시위를 이어가는 시민들이 6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 설치된 개표소 앞에서 재선거를 요구하고 있다. /뉴시스

5일 오후 5시 30분쯤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 경기장 인근에는 경찰 비공식 추산 약 1만명이 집결했다. 투표지가 부족해 마감이 연장됐던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의 투표함 2개가 있는 개표소다.

개표소 앞 시위 참가자 상당수는 20·30대 청년들이었다. 서울시 실시간 도시 데이터에 따르면 오후 6시 올림픽공원 내 인구는 4만2000~4만4000명으로 집계됐는데 이 중 32.3%가 20대다.

이날 서울 지하철 올림픽공원역에는 땡볕 아래서 스케치북에 태극기나 ‘재선거’라는 문구를 적어주는 청년이 여럿 보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그린 종이를 집회 참가자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태극기 그림을 받아가려는 청년 50여 명은 길게 늘어서 줄을 서고 있었다.

서울 마포구에 사는 직장인 최모(30)씨는 “이번 선거는 이미 투표지 부족으로 오염된 선거”라며 “본투표 날 선관위에서 즉각 투표를 중단하고 개선책을 찾았어야 했는데 당시 어물쩍 넘어가려 했던 태도부터 너무 화가 났다”고 했다. 이어 “부실 선거 지적이 한두 번 있던 것도 아닌데 자정 작용도 안 됐다”며 “그런데도 자체 조사로 퉁 치려 하는 선관위가 법이나 국민보다 위에 있는 무소불위 단체 아니냐”고 했다.

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역 앞에서 20·30 청년들이 태극기를 그리거나 '재선거'라는 문구를 적은 종이를 집회 참여자들에게 나눠주고 있다./독자 제공
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역 앞에서 20·30 청년들이 태극기를 그리거나 '재선거'라는 문구를 적은 종이를 집회 참여자들에게 나눠주고 있다./독자 제공

아이와 함께 온 30대 부부도 많았다. 유모차를 끌고 온 30대 B씨는 “윤석열 전 대통령은 자신의 권한을 잘못 사용해 탄핵됐지만 이번 지방선거에서 국민은 반드시 행사해야 할 권한 자체를 박탈당했다”고 말했다.

미혼 남성 30대 C씨는 경기 시흥에서부터 친구와 함께 잠실 개표소를 찾았다. C씨는 “주중에는 회사에 출근하느라 참석하기 어렵겠지만 이 상황이 이어진다면 다음 주말에도 꼭 집회에 참석하겠다”고 했다.

반도체 대기업에서 일하는 직장인 D(42)씨는 “우리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고자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D씨는 “살면서 한 번도 시위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번만큼은 시위에 참가하지 않으면 부끄러울 것 같았다”며 “매번 투표를 독려하던 선관위가 국민의 소중한 투표권을 함부로 한 것에 화가 난다”고 했다.

6일 오후 11시쯤 서울 송파구 잠실 개표소 앞에서 '투표 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선관위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김도연 기자
6일 오후 11시쯤 서울 송파구 잠실 개표소 앞에서 '투표 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선관위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김도연 기자

◇개표소 앞 시위, 3일 차로 이어질 전망

오후 11시쯤 개표소 앞은 ‘재선거’라는 구호와 애국가가 끊이질 않았다. 몰린 인파에 자발적으로 우측 통행을 안내하거나 분리수거를 돕는 시민들이 집회 질서를 정리했다.

3일 차 집회로 이어가고자 텐트를 치거나 돗자리를 깐 채 담요를 덮고 잠을 청하는 시민들도 다수 보였다. 참가자들에게 컵라면, 얼음물 등을 나눠주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이날 개표소 앞에서 만난 직장인 김모(26)씨는 집회 참여자에게 나눠줄 태극기를 그리고 있었다. 막차가 끊겨 집에 돌아갈 차편이 없어 태극기를 마저 그리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갈 것이라고 했다. 김씨는 “집회를 구경하러 왔다가 일손을 보태고 싶었다”고 했다.

집회 현장 곳곳에는 집회 안내문이 게재돼 있었다. 안내문에는 ‘하나의 목소리로 뭉칠 수 있게 재선거, 애국가만 외쳐달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조직이 아니며 금전적 후원을 받지 않는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경찰 근무 교대 시간을 존중해달라’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6일 오후 11시쯤 서울 송파구 잠실 투표소 앞. 집회 안내문 뒤로 야간 집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앉아 구호를 외치고 있다./김도연 기자
6일 오후 11시쯤 서울 송파구 잠실 투표소 앞. 집회 안내문 뒤로 야간 집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앉아 구호를 외치고 있다./김도연 기자

◇대학가에서는 ‘선관위 규탄’ 입장문 잇따라 발표

대학 총학생회에서도 투표 용지 부족 사태를 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규탄하는 입장문을 잇따라 발표하고 있다.

지난 5일 서울대 단과대 학생회장 연석회의 운영위원회는 “전체 유권자 수의 절반에 불과한 투표 용지만을 인쇄한다는 판단은 도대체 어떤 기준에서 나온 것이며, 용지가 소진돼 갔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대책 없이 손 놓고 있던 태도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라며 “헌법이 보장하는 선거권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호해야 할 기관이 보여준 안일함은 숱한 의문을 자아낸다”고 비판했다.

고려대 총학생회도 같은 날 “예상을 넘어선 시민들의 투표 참여는 민주주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이자, 선관위가 더욱 철저히 보장했어야 할 시민의 의지인데, 이를 이유로 유권자의 권리 보장 실패를 설명하는 건 우스운 핑계이자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연세대 총학생회는 “행정적 편의를 앞세워 국민의 권리 행사를 가로막은 행태는 어떠한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중앙선관위가 헌법이 부여한 절대적 책무를 내버려둔 것”이라고 지적했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반발한 시민들이 6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서 재선거를 촉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박상훈 기자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반발한 시민들이 6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서 재선거를 촉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박상훈 기자

◇개표소 100m 떨어진 곳에선 K팝 공연, 안전 우려도

한편 경찰은 인파가 몰린 잠실 개표소 일대에 기동대를 투입해 출입구를 막고 있다. 전날 잠실7동 제2투표소 인근 시위대를 경력 1000여 명으로 강제 해산했으나 개표소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투표소에 고립됐던 선거관리위원회 직원 수십 명은 대부분 개표소를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개표소에서 약 100m 떨어진 KSPO돔(체조경기장)과 88잔디마당에서는 하이브가 여는 K팝 공연도 열려 인파 사고 위험도 제기되고 있다./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