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살만은 "No" 했다는데… 트럼프, 왜 사우디·이스라엘 수교 목매나
[News&Why]
'아브라함 협정' 아랍권 확대 추진
미국 에너지부가 22일 사우디아라비아와 양자 평화 원자력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미국 기업이 사우디 민간 부문 원자력 산업을 지원하고, 자체 우라늄 농축도 추진하는 내용이 골자다. 하지만 에너지부 공식 발표 직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협정은 승인될 것이지만, 사우디가 매우 존경받고 성공적인 ‘아브라함 협정’에 가입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썼다. 그러자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페이스북에 “트럼프 대통령 말씀대로 사우디의 아브라함 협정 가입은 중동 평화를 위한 역사적 도약”이라고 거들었다.
트럼프가 원자력 협정 체결 후 사우디에 돌연 조건을 내걸면서, 자신의 핵심 중동 정책인 아브라함 협정의 확대에 승부수를 던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는 이란과 휴전 협상을 진행하던 지난 5월 사우디를 비롯해 카타르·파키스탄·튀르키예·이집트·요르단 정상과 전화 통화를 갖고 아브라함 협정 가입을 촉구했다. 트럼프는 지난해 10월에도 “사우디가 들어오면 모두가 들어온다”며 아랍권의 아브라함 협정 참여를 촉구했다.
2020년 9월 15일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트럼프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압둘라 빈 자예드 알나흐얀 아랍에미리트(UAE) 외무장관, 압둘라티프 알자야니 바레인 외무장관이 모여 이스라엘과 UAE·바레인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는 평화 협정문에 서명했다. 화해 당사자인 이스라엘(유대교)과 UAE·바레인(이슬람교), 중재자 미국(기독교)에 모두 친숙한 선지자 이름을 딴 ‘아브라함 협정’으로 명명됐다. 서명식 장면이 1993년 같은 장소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 중재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화해·공존을 선언한 ‘오슬로 협정’을 연상시킨다는 평가도 나왔다.
트럼프는 서명식에서 아브라함 협정이 “수십 년 분열과 갈등을 겪은 새로운 중동의 시작”이라면서 “5~6개 중동 국가와 조속히 참여 협상을 가질 것”이라고 했다. 이에 사우디·이집트·튀르키예·카타르 등 중동 주요국들의 합류가 가시화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하지만 이후 상황은 트럼프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아프리카지만 범아랍권으로 분류되는 모로코(2020년 12월)와 수단(2021년 1월)이 이스라엘과 관계를 정상화하며 아브라함 협정 참여국이 됐지만, 이후엔 추가 합류 소식이 뚝 끊겼다.
정권 교체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는 평가다. 2021년 출범한 민주당 조 바이든 행정부는 아브라함 협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계승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바이든은 트럼프와 밀착했던 네타냐후와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와 갈등했다. 2023년 10월 이스라엘이 자국을 침공한 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에 대한 대대적인 격퇴전에 나서고, 아랍권이 이스라엘을 일제히 규탄하면서 관계 개선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지난해 백악관에 재입성한 트럼프는 아브라함 협정의 재개 및 확대를 중동 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다. 지난해 11월 아브라함 협정의 다섯 번째이자 트럼프 2기 첫 가입국으로 카자흐스탄이 발표됐다.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 최대 경제·영토 대국이라는 상징성을 가졌지만, 아브라함 협정 합류 소식은 오히려 이 협정 확산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반증으로도 인식됐다. 카자흐스탄은 소련 해체로 독립국이 된 첫해인 1992년에 이미 이스라엘과 수교했고, 이슬람 신도 비율이 높긴 하지만 세속주의 정책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트럼프가 사우디를 핵심 공략하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사우디의 참여는 이미 합류한 다섯 나라를 합친 것 이상의 엄청난 파급력을 가져올 수 있다. 사우디는 종파를 초월한 이슬람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태어나 신의 계시를 받은 ‘메카’와 박해를 피해 피신한 ‘메디나’라는 양대 성지를 품고 있다. 전 세계 20억 무슬림이 하루 다섯 차례 메카를 향해 절을 하고 매년 2000만명의 순례객이 사우디를 찾는다. 영토·인구·군사력·경제력 등에서도 중동 내 위상이 독보적이다.
이 때문에 사우디가 협정에 참여할 경우 파급력이 가장 크다고 판단한 트럼프가 원자력 협정과 연계하면서까지 실권자 빈살만을 끈질기게 압박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사우디의 합류가 결정되는 순간 아브라함 협정이 중동의 새로운 질서로 자리 잡을 수 있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미국이 개입하지 않고도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을 하나의 안보 협력망으로 묶어 이란을 견제하면서 미국의 군사적 부담을 줄일 수 있다. 향후 전개될 이란과의 종전 협상 내용에 대해 미국 내 강경 보수파의 반발을 부르더라도, 아브라함 협정 확대라는 더 큰 성과로 포장해 정치적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라는 해석도 있다. 국제위기그룹(ICG)의 알리 바에즈 이란 프로젝트 책임자는 로이터에 “트럼프가 이란 합의를 아브라함 협정의 후속편으로 팔려 한다”고 평가했다. 아브라함 협정은 트럼프가 열망하는 노벨평화상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카드로도 인식돼왔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는 평가다. 사우디는 그동안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수립 없이는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네타냐후 이스라엘 정권의 ‘팔레스타인 독립 불가’ 입장과 평행선을 긋고 있다. 이스라엘과의 관계 개선에 여러 차례 거부감을 표했던 빈살만의 태도가 갑자기 바뀔 가능성도 크지 않다는 지적이다. 지난 5월 영국 더타임스는 “빈살만이 트럼프의 아브라함 협정 참여 요구에 이미 100번이나 안 된다고 말했는데 또 말해야 하는 것에 화가 나 있다”는 측근의 발언을 전했다. 다른 국가들도 아브라함 협정에 대한 입장이 바뀌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이란 간 휴전 협상을 중재하고 있는 파키스탄마저 “국가의 근본 이념과 충돌한다”며 트럼프의 아브라함 협정 참여 요청을 거부했다./조선국제
☞아브라함 협정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체결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외교 정상화 협정.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에서 모두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하는 예언자 아브라함의 이름을 땄다. 2020년 9월 백악관에서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바레인 사이에 먼저 체결됐고, 이후 모로코와 수단, 카자흐스탄이 합류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앙숙 이란을 고립시키는 외교적 수단의 성격도 있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