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각지에서 러시아가 배후로 의심되는 파괴 공작(사보타주)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드론 침범, 조명탄 발사, 열차 사고 유도 등 제각각 형태로 유럽 곳곳의 각종 기반 시설과 교통수단을 겨냥한 공격이 진행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중재 시도에도 불구하고 최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상대방의 에너지 시설을 타격하며 교전이 격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항전을 지원하는 유럽 자유 진영을 겨냥한 하이브리드전(정규전과 비정규전을 결합한 전쟁)의 수위를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있는 양상이다.
지난 14일 발트해에선 러시아군과 덴마크군이 간 충돌이 발생했다. 덴마크군은 이날 “공군 소속 페넥 헬리콥터 1대가 게드세르 앞바다 국제 수역에서 러시아 호위함을 상대로 일상적인 촬영 임무를 수행하던 중 조명탄 공격을 받았다”며 “조명탄 2발 중 1발은 헬기에 근접해 지나갔다”고 했다. 덴마크 당국은 블라디미르 바르빈 주덴마크 러시아 대사를 불러 항의했다.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도 “우리를 위협하고, 분열시키려는 이런 무모한 행동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고,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15일 자정 직후엔 발트해에 면한 리투아니아 상공에 정체불명 드론 1대가 침범해 나토 소속 이탈리아 전투기가 긴급 출격했다. 드론은 리투아니아 제2 도시인 카우나스 근처에서 이탈리아 전투기에 격추됐다. 귀도 크로세토 이탈리아 국방부 장관은 이 드론이 “러시아에서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고, 리투아니아 국방부는 “격추된 드론에 폭발 장치가 탑재돼 있었다”고 했다.
같은 날 네덜란드 중부·북부 일대의 철도망 30여 곳에서 파이프 장애물이 발견돼 열차 운행이 전면 중단, 철도 교통이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자칫하면 대량 탈선·충돌 사고로 이어질 뻔한 상황이었다. 철도 운영사는 “해당 물체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설치한 것으로, 철도 인프라에 대한 사보타주”라고 했다. 이로 인해 즈볼레 인근, 위트레흐트~하우다 구간 등 선로가 봉쇄된 일대의 열차 운행이 전면 중단됐고, 독일 등 외국을 오가는 국제선 열차도 운행에 지장을 겪었다.
이 공작의 목적이 네덜란드 사회 분열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이 이날 내년 정부 예산 연설을 하기 몇 시간 전 사건이 발생했는데, 최근 네덜란드는 예산의 사회복지 축소 등을 두고 노조와 농민들은 광범위한 불만을 표출하며 시위 등을 해왔다는 것이다. 국론 분열을 목표로 한 선전 선동과 사보타주는 러시아가 유럽 국가를 상대로 벌이는 대표적인 하이브리드 전술 중 하나다. 지난 달 독일 라이프치히 공항에 누군가 폭발물 드론을 몰래 가져다 놓고 시설물 파괴를 기도하려다 적발됐는데 독일 당국은 러시아의 소행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려는 것으로 보이는 러시아의 공격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13일엔 폴란드와의 국경에서 2㎞ 떨어진 우크라이나 야호딘 부근에서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떠나 폴란드 바르샤바로 가던 여객 열차의 기관차가 러시아 드론 공격으로 크게 파손됐다. 그런데 이 열차보다 불과 몇 분 전 지나간 열차에는 유럽·우크라이나 지도자 연례 회의에 참석하고 귀국길에 오른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 칼 빌트 전 스웨덴 총리 등 유럽 지도자들이 타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국영 철도 회사는 “이 드론의 표적이 외교 관계자들이 탑승한 열차였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밝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러시아가 최근 자신이 탑승한 전용기를 두 차례 공격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8일 몰도바에서 노르웨이로 향하던 젤렌스키 전용기가 드론의 타격을 받을 뻔했는데 러시아의 소행이라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역시 자신을 겨냥한 우크라이나의 기습을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푸틴은 연례 외교·안보 국정 토론회인 ‘발다이 토론 클럽’ 행사 장소를 원래 예정됐던 소치에서 15일 갑작스럽게 모스크바로 옮겼다. 흑해 연안의 휴양 도시 소치는 우크라이나와 멀지 않다. 최근 우크라이나가 드론으로 러시아 각지를 맹폭하는 상황에서 ‘드론 암살’을 우려한 조치라는 해석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유럽 각국에 공포감을 조성하고 여론을 분열시켜 우크라이나 지원의 양대 핵심 축인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유럽연합(EU)의 결속을 해체하려는 목적으로 각국에서 파괴 공작을 펼친다고 보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계속 지원하면 우리나라가 위험해진다”는 여론의 확산을 꾀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 선거를 앞두고 민족주의와 강경 우파 등 러시아에 우호적인 세력을 득세시켜 우크라이나 침략 성공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사보타주 등 러시아의 하이브리드전 대응에 부심해온 나토와 EU의 고민이 더욱 깊어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우리의 준비 태세와 결의를 시험하려는 러시아의 광범위한 침략 및 도발”이라며 “러시아는 우리의 결의가 더욱 강해지는 것만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무력 충돌이 격화하면서 이 전쟁을 끝내려는 트럼프의 존재감도 옅어지는 모습이다. 트럼프가 14일 “에너지 시설 공습 중단에 양국이 합의했다”고 말한 뒤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난타전’이 재개됐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와 자포리자 원전 일대를 공격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남부 시즈란 정유 시설과 드론 생산 시설, 볼가강 연안 사마라 지역의 대형 정유소 등에 보복 공습을 가했다./조선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