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北, 핵 57개" 비핵화엔 입 닫았다

핵무기 숫자 첫 구체적 언급
비핵화 묻자 "이야기 않겠다"
30년 넘은 대북 원칙 흔들려
안규백은 "북핵 80~120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9일 오후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9일 오후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각)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57개의 매우 강력한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는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북한을 ‘핵 보유 세력(nuclear power)’이라 불러왔지만, 북한 핵무기 숫자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올해 안에 김정은과 만날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김정은과의 관계를 재개하려는 이유가 여전히 비핵화인지를 묻는 취지의 질문에는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며 답변을 피했다. 북한은 줄곧 대화 재개 조건으로 ‘핵보유국’ 지위 인정을 내걸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가 북한의 구체적인 핵무기 숫자를 언급한 것은, 북한 핵보유를 인정하면서 핵 프로그램 동결과 제재 완화를 맞바꾸는 ‘거래’에 나설 가능성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의 핵개발이 시작된 이후 한·미가 30년 넘게 유지해온 ‘북한 비핵화’라는 목표가 무너지고 있는 셈이다.

트럼프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내가 김정은과 잘 지낸다는 사실은 나쁜 게 아니라 좋은 일”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애초에 그런 일(북한의 핵보유)이 일어나도록 허용해선 안 됐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그렇게 두지 않았겠지만 그는 핵무기를 갖게 됐다”고 했다. 트럼프는 또 군사 작전이 진행 중인 이란에 대해 “핵무기를 갖게 할 수 없다”고 말한 반면, 김정은에 대해선 자신이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미국에) 똑똑한 대통령이 있는 한 그는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사실상의 ‘핵 보유국’이 됐지만 김정은과 친분이 있기 때문에 핵·미사일 위협을 ‘관리’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北비핵화 포기하나… 트럼프, 핵동결·제재완화 ‘위험한 거래’ 수순

한미는 그동안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비핵화를 목표로 한다는 기조 아래 북한 핵무기 보유량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피해왔다. 하지만 트럼프는 “김정은이 핵무기를 많이 갖고 있다”는 기존의 언급을 넘어 이날 ’57개’라는 숫자를 특정했다. 이는 스웨덴 싱크탱크인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 등 주요 기관, 전문가 그룹 추정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트럼프가 정보 기관 기밀 브리핑을 인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20일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북한 핵무기 숫자에 대해 “우리가 보통은 80~120개 정도로 보고 있는데 정확한 수치를 말하는 것은 제한된다”고 했다. 국방부는 “안 장관이 언급한 것은 국내 연구기관이 추정한 수량”이라고 했다.

사진=백악관
사진=백악관

미국 대통령이 수치를 거론하며 고도화한 북한의 핵능력을 인정한건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트럼프의 이날 발언은 ‘북한의 비핵화는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라는 속내가 표출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트럼프는 1기 때 김정은과 세 차례 만났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후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크게 고도화됐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라는 외교적 뒷배도 확보했다. 북한의 핵 포기 의사가 전혀 없고 비핵화가 어려워졌다는 인식이 미 조야(朝野)에 팽배한 가운데,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외교적 성과’가 필요한 트럼프가 북한과의 거래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공식적으로는 “한반도에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구한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지만, 물밑에선 집권 전 공약 설계 단계부터 1기 때 경험을 교훈 삼아 북핵 문제에 관한 여러 구상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인 2023년엔 트럼프가 재집권할 경우 북한의 추가 핵 개발과 대북 제재 완화 등을 맞바꾸는 이른바 ‘스몰 딜’ 형태의 거래를 추진하는 쪽으로 대북 정책의 변화를 꾀하려 한다는 폴리티코 보도도 있었다. 북한이 ‘핵 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아야 대화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고 고집하는 상황에서, 당장의 회담 성사가 중요한 트럼프 입장에선 문턱을 낮춰야 한다는 유혹이 들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16일 한미 연합 훈련 축소를 지시하며 김정은을 향한 유화 메시지를 발신했고, 17일엔 구체적인 시점 등을 밝히지 않은 채 김정은이 자신의 제안에 ‘응답’했다고 주장했다.

북핵 문제가 30년 넘게 공전하면서 미 조야도 핵물질 생산 제한, 장거리 미사일 시험 제한 등 당장의 위협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인 접근을 강조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올해 4월엔 워싱턴 DC의 대표적인 대북 강경론자인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가 북한의 핵 보유 현실을 인정하고 군축 및 핵무기 비확산을 위한 미·북 간 ‘차가운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핵확산방지조약(NPT)이 핵 보유국으로 공인한 나라는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 등 5국이다. 북한은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등과 함께 사실상의 핵 보유국 취급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과 마주 앉은 트럼프가 핵 동결이나 감축을 제안할 경우 북핵을 일정 수준 용인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미국의 북핵 용인이 현실화할 경우 동북아 안보 지형에 가져올 파장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동 상황에 따른 군 자산 반출, 연합 훈련 축소, 확장 억제(핵우산)에 대한 의구심 등 이미 미국의 방위 공약에 대한 신뢰도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일본을 중심으로 자체 핵무장 같은 각자도생론이 거세게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는 이날 “김정은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는데 북한을 상대로 한 대규모 군사훈련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며 “솔직히 말해 내 임기 동안 매우 잘 행동해 온 (김정은에게) 굉장히 모욕적일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리처드 하스 미국외교협회(CFR) 명예회장은 최근 연합 훈련 축소, 태평양에서의 항공모함 공백을 미국의 ‘아시아 전략 후퇴’로 규정하며 “우리의 친구들은 절망하거나 핵무장을 선택할 것”이라고 했다.

다만 안규백 국방장관은 이날 북한의 핵 능력을 억지하기 위해 한반도에 미국 전술핵 배치를 하는 것에 찬성하냐는 질문에는 “미국의 전술핵(배치)은 우리가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미국의 핵우산을 확실히 제공받는 정책으로 우리가 일관되게 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조선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