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주부'에 사진 1장 보냈다가... 러 지휘관, 드론 폭탄 맞았다
데이트앱 窓에서 벌어지는 우크라 러軍 점령지의 비밀 전쟁
애틀랜틱 몬슬리, 우크라 여성들과 군 장교들의 '드론 공격 좌표' 얻는 '허니트랩' 소개
점령지의 관공서ㆍ병원ㆍ학교서 일하는 우크라 여성, 러 병사들 마음 빼앗는 '전사-마녀' 역할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남부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군의 체첸계 지휘관 아흐메드는 지난 몇 달 동안 우크라이나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고 믿었다. 그는 왓츠앱으로 ‘35세의 외로운 주부’라고 자신을 밝힌 우크라이나 여성과 대화를 나눴다. 둘은 친해졌고, 어느 날 여성은 그에게 “당신의 일상을 담은 사진을 보내 달라”고 했다. 그 사진이 보내고 난 뒤, 얼마 안 돼 그 러시아군 주둔지는 드론 폭탄 세례를 받았다.
오늘날 전쟁은 더 이상 참호와 포병 진지에서만 벌어지지는 않는다. 특히 러시아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에선 데이트앱ㆍ텔레그램ㆍ왓츠앱 등 소셜미디어의 메시지창이 또다른 전장(戰場)이 되고 있다고, 미 월간지 애틀랜틱 몬슬리 6월호가 보도했다. 이 전장에서 가장 치명적인 무기는 외로움과 신뢰, 로맨스다.
부부 사이 애정이 식어 무료하다는 ‘35세 우크라이나인 주부’는 아흐메드에게 종종 전쟁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기밀 사항을 물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전선은 어떠한지”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전쟁이 끝나면 뭘 할 생각인지” 일상의 대화가 다였다. 둘은 점점 가까워졌고, 그러던 어느 날 여성은 “당신의 일상을 보고 싶다”며 사진 한 장을 보내 달라고 했다.
아흐메드가 보낸 사진엔 (최소한 그의 생각엔) 별 정보가 없었다. 막사 안에서 동료와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가 놓친 것이 있었다. 사진 속 벽에는 부대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 한 장이 걸려 있었다. 얼마 뒤, 해당 좌표는 우크라이나 드론의 공격을 받았다.
‘35세 외로운 주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코드명 ‘세르히이(Serhiy)’인 우크라이나 군사정보국 소속 중년의 남성 장교였다. 그는 러시아군과 체첸군을 상대로 온라인 연애를 하며 군사 정보를 수집하는 비밀 작전을 수행한다. 동료들은 애틀랜틱에 “세르히이는 워낙 연애를 잘해, 우리 팀 남자들도 그에게 연애 조언을 구한다”고 말했다.
◇현대판 ‘허니트랩(Honey Trap)’
냉전 시절, 소련의 KGB(국가보안위원회)와 미국의 CIA(중앙정보국), 동독의 슈타지(Stasiㆍ국가보안부)는 매력적인 남녀가 목표물에 접근해 정보를 빼내는, 이른바 허니트랩’ 스파이 수법을 썼다. 지금도 중국의 대외정보ㆍ방첩기관인 국가안전부는 각국에서 이런 수법으로 정치인과 의회 주요 직원, 방산 기업 임원들에게 접근해 기밀을 빼낸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군 정보당국의 ‘21세기판’ 허니트랩은 실제 만남 없이, 스마트폰과 인터넷만 있으면 된다. 점령지에 주둔하는 러시아군 병사들은 가족과 떨어져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처음 대화는 취미ㆍ고향ㆍ연애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친해지면 “오늘은 어디 있었어?” “부대 생활은 어때?” “사진 좀 보내줄래?”와 같은 전선 이야기로 서서히 옮겨간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군 정보장교들이 원하는 것은 기밀이 아니다. 사진 속 차량 번호, 창문 밖 풍경, 벽에 걸린 지도, GPS 정보 등 아주 작은 단서이고, 러시아군 병사들은 종종 자신도 모르게 이를 제공한다고 한다.
◇온라인 채팅ㆍ정보 수집 요원의 대다수는 우크라 여성
러시아군 점령지에서 이뤄지는 첩보ㆍ저항 활동은 과거엔 공개적이었고, 러시아에 대한 반감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침공 초기만 해도, 우크라이나 할머니가 러시아군 병사에게 해바라기 씨를 나눠주며 “꼭 호주머니에 넣어둬라. 여기서 네가 죽은 뒤에 그 자리에 해바라기가 자라게”라고 저주하는 동영상이 전세계에 확산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광장에서 국기를 흔들며 국가를 불렀고, 러시아군을 조롱하는 낙서를 했다. 또 검문소를 쉽게 통과하는 아이들은 러시아군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줬다.
그러나 곳곳에 러시아군의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고 저항세력에 대한 고문이 자행되면서, 저항과 첩보 활동은 더욱 은밀해졌다. 러시아군 카메라는 마스크 착용 여부와 관계없이 개인을 거리 구역마다 추적할 수 있다.
애틀랜틱은 러시아 측 행정기관, 진료소, 학교,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많은 여성이 ‘전사 마녀(warrior-witches)’가 돼 우크라이나군 정보기관에 정보를 제공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여전히 여성이 ‘전투원’ ‘정보원’일 수 있다고 상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매일 아침 장바구니를 들고 러시아군 병영 앞을 지나가는 할머니가 자신들을 타격하는 ‘킬 체인(kill chain)’의 첫번째 연결고리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일부 여성은 러시아군 부대에 구호 물자를 제공하는 러시아계 자선단체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한다. 모든 ‘접촉’은 곧 정보 수집의 기회가 된다. 수집된 정보는 암호화된 통신망을 거쳐 우크라이나군 드론 부대로 전달된다.
5월말쯤 러시아군과 러시아 측 구호단체들도 이러한 위험을 인지하고 경고문을 배포하기도 했다.
◇ 러시아군보다 체첸군이 더 쉬운 표적
온라인 채팅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이들도 ‘세르게이’ 같이 일부 ‘재능’ 있는 남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점령지의 우크라이나 여성들이다. 이들은 애틀랜틱에 “러시아 본토 출신 병사들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표적”이라며 “대화를 시작한 지 5분도 안 돼 ‘섹스를 할 거냐, 말거냐’를 묻는다”고 말했다.
반면에, 체첸 출신 병사들은 믿음이 쌓이고 감정적으로 연결되는 ‘진짜 관계’를 원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그 결과 온라인 관계를 이용한 정보수집 작전의 성공률도 더 높다.
◇채팅창에서 시작해 드론 공격으로 끝나는 전쟁
점령지 정보원들의 ‘통신 보안’을 위해, 우크라이나군은 긴급한 경우엔 ‘클린’ 휴대폰을 공수한다. 점령지에서 구입하거나 사용하는 모든 휴대폰에는 러시아 스파이웨어가 설치돼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채팅에서 시작된 대화는 좌표가 되고, 좌표는 드론 공격으로 이어진다. 우크라이나 드론 부대 지휘관들은 상당수 공격 임무가 점령지 내부 저항세력이 제공한 정보에 의존한다고, 이 잡지에 말했다.
고(高)가치 표적의 경우 좌표 전송에서 실제 공격까지 걸리는 시간이 15분에서 수 시간에 불과하다. 한 러시아 병사가 온라인에서 ‘썸’을 타는 동안에, 위치가 파악돼 드론 공격을 받았다.
‘외로운 35세 주부’와 채팅했던 체첸 지휘관 아흐마드는 어느 날 갑자기 온라인에서 사라졌다. 우크라이나군 정보당국은 그의 생사는 모르지만, “그는 아직도 자신이 중년의 ‘형씨’(chuvakㆍ러시아어)랑 시시덕거렸단 건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흐마드가 정보제공원이라는 게 공개돼도 괜찮을까”라는 물음에, 우크라이나 측 정보관계자는 “오히려 그의 부대원들이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돼, 아예 거세(去勢)해 버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어떤 전쟁은 사랑의 말 한마디, 사진 한 장, 채팅창 속 작은 거짓말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