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이민자 하루 6만명 상륙… 8만명 사는 스페인령 소도시 마비
국경 뚫고 난입… 최소 41명 사망
지난 30일(현지 시각) 오전 아프리카 최북단의 스페인 자치령 세우타(Ceuta)에 고무보트가 몰려들었다. 육지가 가까워지자 보트에 타고 있던 이민자 수백 명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얕은 물을 헤엄쳐 해안에 올라선 이들은 환호하며 세우타의 거리를 내달렸다. 철책이 있었지만 밀려들어오는 인파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한 남성은 로이터에 “경찰이 우리를 막으려 했지만 단결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스페인 당국은 31일 “지난 24시간 동안 약 6만명의 이민자가 세우타에 무단 진입했다”고 발표했다. 세우타 인구 8만3500명의 약 70%다. 현지 경찰에 따르면 바다를 건너거나 해변 방파제를 넘는 등 월경 과정에서 41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세우타 앞바다엔 버려진 고무보트와 쓰레기가 떠다니고, 이민자들이 거리와 공터를 점령하고 밤을 지새우는 사이에 세우타 행정은 순식간에 마비됐다. 스페인 법원이 최근 바다를 통해 들어온 이민자를 즉시 송환 대상에서 제외하는 판결을 내놓으면서 벌어진 이번 사태로 이민 친화적인 스페인의 정책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가 안보 위기 상황”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인접한 세우타는 가장 좁은 곳의 폭이 14㎞인 지브롤터 해협만 건너면 유럽 대륙에 닿는 위치에 있다. 스페인의 또 다른 자치령 멜리야와 함께 유럽연합(EU) 국가가 아프리카 국가와 육상 국경을 맞댄 유일한 지역이다. 이런 지리적 요건 때문에 아프리카 이민자가 유럽 대륙으로 가는 교두보 역할을 해왔지만, 이번처럼 많은 이민자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온 것은 이례적이다.
스페인 대법원이 지난달 8일 내놓은 판결이 배경으로 꼽히고 있다. 스페인 대법원은 육상 국경을 넘어온 이민자를 즉시 송환했던 것과 달리, 바다를 통해 들어온 이민자는 난민 신청 여부 확인이나 통역 등 절차를 제공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후 아프리카 이민자의 유럽 밀입국을 알선하는 조직들이 ‘모로코에서 바다를 거쳐 세우타에 들어가면 곧장 돌려보내지 않는다’고 홍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가 이민자 증가로 골머리를 앓으며 국경 단속을 강화하는 가운데, 스페인은 저출산과 노동력 부족 등을 극복하는 차원에서 이민에 관대한 정책을 펴고 있다. 지난 6월 불법 체류자 등 미등록 이주민 50만명에게 정식 체류 자격을 부여하는 프로그램은 신청자가 100만명이 넘었다. 직업 훈련, 언어 교육이 포함된 이주민 지원 프로그램에도 5억500만유로(약 8400억원)를 투입하기로 했다.
이번 사태로 스페인의 이민 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가열될 것으로 전망된다. 후안 헤수스 비바스 세우타 시장은 30일 라디오에 출연해 “세우타가 국가 재난을 겪고 있다”면서 중앙정부에 국가 비상사태 선언과 대책을 요청했다. 제1 야당 국민당의 알베르토 누녜스 페이호 대표도 소셜미디어에서 “세우타 상황은 절박하다”며 “정부가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국가 안보 위기에 직면했다”고 했다.
스페인 내무부는 현장에 병력을 파견해 육상 국경을 통제하고 인파가 몰려든 거리의 치안 유지에 나섰다. 페드로 산체스 총리도 세우타를 찾아 “스페인 영토를 침해하는 행위”라며 “세우타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했다. 모로코 정부도 육로 국경 검문소 인근에 물대포를 배치했다.
◇인접 국가와 갈등 조짐도
세우타 사태가 외교 갈등으로 번질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이민에 강경한 입장인 덴마크와 스페인 인접국 이탈리아에서는 강한 반발과 함께 스페인과 솅겐 조약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솅겐 조약은 EU 국가 간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기 때문에, 세우타를 통해 스페인에 이민자가 몰려들면 EU 전역으로 퍼져 나갈 가능성이 있다.
덴마크의 메테 프레데릭센 총리는 이날 “EU는 솅겐 협력 중단을 포함해 필요한 조치를 즉시 취하고, 모든 선택지를 고려해야 한다”며 “통제되지 않은 이민은 유럽과 덴마크에 위협이 된다”고 했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또한 “우리는 국경과 시민 안전을 사수하기 위해 스페인과 솅겐 조약 중단을 포함한 특별 조치를 마련할 것”이라고 했다. EU는 공공 질서나 국가 위기가 우려되는 상황에는 솅겐 조약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국경 검문을 재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안토니오 타야니 이탈리아 외무장관도 “스페인 정부가 불법 체류자 50만명에게 스페인 시민권, 나아가 유럽 시민권을 보장하겠다고 한 결정이 얼마나 심각하게 잘못됐고 인신매매를 조장하는지 보여준다”면서 “스페인과 솅겐 조약을 중단하자는 의견에 찬성한다”고 했다. 이에 호세 마누엘 알바레스 스페인 외교부 장관은 “친밀한 국가의 외무장관답지 못한 발언”이라면서 스페인 주재 이탈리아 대사를 소환하겠다고 했다./조선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