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9L·통조림·여권 챙겨라"… 英정부, 72시간 생존 지침 권고

러시아 사이버 공격·자연재해 등 대비
냉전기 핵전쟁 지침 이후 이례적
야당선 "국민에 떠넘기기" 비판

앤디 버넘 영국 총리 / 연합뉴스
앤디 버넘 영국 총리 / 연합뉴스

최근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하이브리드전(정규전과 비정규전을 결합한 전쟁)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영국 정부가 모든 가정에 최소 사흘을 버틸 수 있는 비상식량과 생필품을 비축하라는 대국민 캠페인을 시작했다. 적대국의 사이버 공격이나 대규모 정전·자연재해 등에 대비하라는 취지다. 영국에서 이 같은 운동이 펼쳐지는 것은 냉전기였던 1980년대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일각에서는 국민의 안보를 책임지는 정부가 국민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지난 7월 23일 영국 런던 인근 할로의 한 펍을 방문한 앤디 버넘 영국 총리. /AFP 연합뉴스
지난 7월 23일 영국 런던 인근 할로의 한 펍을 방문한 앤디 버넘 영국 총리. /AFP 연합뉴스

영국 가디언 등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지난 22일 각 가정에 72시간 동안 버틸 수 있는 비상물자를 준비하도록 하는 ‘비 레디(Be Ready)’ 캠페인을 발표했다. 두 쪽 분량의 지침에는 1인당 하루 3L씩 총 9L의 생수와 통조림 등 비상식량, 현금, 구급상자, 여분의 배터리가 든 손전등, 태엽식 FM라디오, 여권 사본 등을 준비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72시간을 기준으로 잡은 것은 대규모 재난 발생 시 전기·수도 등 공공 서비스가 복구될 때까지 각 가정이 최소 사흘은 버틸 수 있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영국에서는 지난 1월 폭풍 ‘고레티’로 수만 가구가 정전을 겪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전력 공급이 72시간 넘게 끊겼다.

지난 9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러시아의 미사일·드론 공격으로 대규모 정전이 발생한 가운데 차량들이 불 꺼진 도로를 달리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지난 9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러시아의 미사일·드론 공격으로 대규모 정전이 발생한 가운데 차량들이 불 꺼진 도로를 달리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이번 지침은 2022년 발발한 우크라이나전 이후 러시아의 대유럽 하이브리드전이 본격화하고 있는 가운데 나왔다. 웨스 스트리팅 영국 국방장관은 러시아 등 적대국이 전력망과 결제 시스템, 공급망 등을 노리는 공격을 기존의 ‘하이브리드전’이라는 표현 대신 ‘국가가 후원하는 테러’로 불러야 한다며 “위협은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며, 우리에게 닥치고 있다”고 했다. 정부는 이번 캠페인이 2024년 5월부터 제공해 온 가정용 비상 대비 지침을 보완한 것으로 앞으로 3년간 대국민 홍보를 이어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정부 발표 이후 실제 영국인들은 지침에 따라 비상물자를 준비하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비상식량과 생존 도구를 판매하는 ‘서전트 프리퍼 샵’ 잭 브라운 공동대표는 “캠페인 시작 후 24시간 만에 평소 한 달 치 주문을 받았다”고 했다.

정치권에서는 야당을 중심으로 정부가 국민에게 위기 대응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며 비판하고 나섰다. 케미 베이드녹 보수당 대표는 “시골 주민들은 이미 정전에 대비해 스스로 준비하고 있다”며 “정부가 국경과 군대, 국가 기반 시설을 제대로 지키는 게 먼저”라고 했다. 반면 앤디 버넘 총리는 “위기 상황에서는 맑은 정신이 필요하다”며 술 대신 콩 통조림과 수프 등을 비축하겠다고 응수했다./조선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