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착기 모자라 매몰자 맨손 구조… 베네수엘라 '잃어버린 30년' 민낯
망가진 국가 시스템이 피해 키워
24일 베네수엘라 북부를 연쇄 강타한 규모 7.2·7.5 강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589명까지 늘어났고, 부상자는 4300명에 이른다고 델시 로드리게스 베네수엘라 임시 대통령이 25일 발표했다. 그러나 현재 4만명 이상이 행방불명자로 접수됐고, 이 중 상당수가 최대 수천 채의 붕괴된 건물 더미에 매몰된 것으로 알려져 희생자 숫자가 더욱 늘 것으로 우려된다. 생존자를 위한 ‘골든타임’인 72시간이 다가오고 있지만 상당수 피해 지역에서는 수색 작업 속도가 지지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희생자가 최소 1000명에서 최대 10만명에 이를 수 있다는 미국 지질조사국의 발표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호르헤 로드리게스 국회의장은 이날 수도 카라카스 일대에서 병원 8곳과 베네수엘라 적십자사 본부, 프랑스 대사관을 포함해 최소 250개 건물이 파손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라과이라와 산 펠리페 등 다른 피해 도시까지 집계할 경우 피해 규모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현지 언론들이 전한 카라카스 등 피해 지역 상황은 아비규환 그 자체다. 내진 보강이 이뤄지지 않아 힘없이 무너진 건물 더미 앞에서 천에 싸인 가족들의 시신 옆에서 주민들이 울부짖었다. 다른 주민들은 구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삽과 곡괭이 등 임시 도구를 이용해 잔해를 치우며 생존자를 찾았다. 주민들은 소셜미디어에 잇따라 ‘Desaparecido(스페인어로 실종자)’라고 적힌 가족사진을 공유했다. 정부의 구조 작업을 기다리다 못해 직접 생존자를 찾기 위해 팔을 걷은 것이다.
카라카스에서 17세 소년을 구조한 주민 마이켈 린콘은 스페인 매체 EFE에 “모든 것을 맨손으로 해야 했다”며 “잔해 아래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듣고 정신없이 콘크리트를 치웠다”고 했다. 가까스로 소년은 살렸지만 함께 있던 가족들은 모두 숨진 채 발견됐다고 한다.
라과이라 주민 카를로스 보르헤스 역시 로이터에 “굴착기 한 대 없이 콘크리트 더미를 손으로 치웠다”며 “이런 방식으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호소했다. 각종 구조 현장에서는 “국가보다 이웃이 먼저 사람을 구하고 있다”, “군대라도 투입해 달라” 등의 외침이 이어졌다.
이번 지진은 규모 7.2와 7.5 지진이 불과 39초 간격으로 발생한 ‘이중 지진(doublet)’이었다. 진원 깊이도 각각 20㎞와 10㎞로 얕아 지진 에너지가 거의 그대로 지표에 전달됐고, 인구 밀집 지역인 카라카스 일대를 강타하면서 피해가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인명 피해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베네수엘라에서는 1967년 수도 카라카스 일대에서도 강진이 발생했지만 사망자는 200여 명으로 이번 지진에 비해 크게 적었다.
태평양에 면한 남미 서부 지역은 ‘불의 고리’로 불리는 환태평양 조산대에 속해 있어 지진과 화산 활동이 활발한 편이다. 그러나 카리브해에 접한 베네수엘라는 페루·콜롬비아·칠레 등 다른 남미 국가와 달리 불의 고리에서 벗어나 있다. 이런 일련의 상황 때문에 이번 지진은 실패한 국가 체제에서 비롯된 인재(人災)라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 1999년 집권한 반미(反美) 성향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임기 중 사망한 뒤 2013년 정치적 후계자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집권으로 이어지면서 베네수엘라에서는 좌파 정권이 27년간 지속됐다.
차베스·마두로 정권은 반미·좌파 성향이 뚜렷했고 미국 주도의 경제 제재에 직면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정권은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석유로 창출되는 부(富)로 무상 복지 정책을 시행하면서 핵심 지지층인 저소득층 지지 확보에 주력했고, 이는 초인플레이션 등 부작용을 불러오며 경제는 추락했다. 이러한 여파로 각종 사회기반 시설의 보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내진 설계 없이 철근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엉성하게 지어진 건물들이 장기간 방치됐다. 이번에 지진 충격으로 붕괴한 건물 상당수가 노후한 콘크리트 건물로 파악된다.
이런 사정을 보여주는 단면이 시멘트 산업이다. 차베스 정부가 시멘트 산업을 국유화한 이후 국영 시멘트 회사의 생산 능력이 크게 떨어졌고, 경제난까지 겹치면서 만성적인 시멘트 부족 현상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노후 건물의 균열을 보수하거나 내진 성능을 보강하는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이번 지진에서 상당수 건물이 한꺼번에 붕괴하는 배경이 됐다고 BBC는 분석했다.
이에 따라 이번 지진의 성격이 최대 30만명 가까이 희생된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때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세계 최빈곤국이자 만성적 내전 상태였던 아이티는 당시 규모 7.0 지진으로 부실하게 지어진 주택과 건물이 무너지면서 사망자가 급증했다.
하상섭 국립외교원 교수는 “베네수엘라는 이미 정치 불안과 경제 위기, 사회기반시설 노후화로 국가 대응 역량이 크게 약화된 상황이었다”며 “이런 상태에서 초대형 자연재해까지 발생해 앞으로 구조와 복구 작업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조선국제